당신과 이별하는 밤
꿈을 꿨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넓게 펼쳐진 잔디밭. 소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이바는 그 앞에 서있었다. 휴식을 취하려면 잔디 위에 눕는 게 좋을 거라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들리지 않았어야 할 목소리인데. 기억에서 지워지지도 않았고. 응? 하고 확인을 할 때는 오히려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이라고 인사하기에는 늦었던 것도 같다. 처음부터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카이바는 잔디밭에 기분 좋게 누울 수 없었다. 현실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미노 공원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가장 최근에 간 것도 1년이 넘은 지 오래였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서있었다.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그를 불러도 대답이 없어 그가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카이바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 동시에 사야에 들어온 것은 공원이 아닌 암흑이었다.
적은 수면시간에는 충분히 있을 수 있을 일이라 생각했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그랬다. 며칠 간 제대로 잔 적이 없으니 깊게 자지 못해서 그렇다고. 그렇게 하면 꿈을 꾼 것도 이해가 되었다. 악몽이라면 악몽이었다. 죽은 사람이 나왔다. 기분 좋지 않은 아침을 맞이하던 카이바는 오늘이 도미노 고등학교의 3학년이 된 첫 날임을 깨달았다. 4월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바쁜 회사 일을 제쳐두고 학교로 갈 이유도 없었다. 등굣길이 되었든 출근길이 되었든 7시에는 일어나야 했다는 사실이 그런 불만으로 변하는 건 아니었다. 모쿠바 또한 아침부터 좋지 않은 상태의 카이바를 보고 걱정스러웠던 모양인지, 오늘은 쉬는 게 어떤지를 물었지만 카이바의 출석이나 여러 가지 따지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는 그 스스로의 일을 안 할 사람은 아니니 굳이 제안하거나 설득 하는 일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카이바에게 있어서 그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의미를 따지면 많다. 그를 이겨본 적 없는 것도 그렇고, 자신을 구해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나타날 이유가 있을지를 생각하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기에 카이바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잠시 옆을 스쳐간 사람이 아닌 한 학급의 친구, 라이벌. 그리고 자신에게 어느 특정 부분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졸업학년이라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여전히 긴 수업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유우기는 뭔가를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위험해보여 카이바가 상자들 중 반을 가져갔다. 고마워. 조금 놀란 표정을 했던 그는 금방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음 시간이 미술이라서 교무실로 갔더니 선생님이 가져가라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2층 미술실까지 내려가는 모양이었다. 3학년 G반의 반장이 되었다고 하니 그 사이 많은 게 변하기는 했던 모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카이바는 A반이었다. 바로 옆 반은 아니었지만, 서로 만나러 오는 편이라 할 수도 없었고 이렇게 마주치는 것도 우연에 가까웠다. 애초에 1층에 있는 양호실로 가던 중이었으니 2층까지 가는 부담도 없었지만 유우기는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저기, 하고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유우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수업 준비를 위해 미술실로 오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우기가 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카이바는 다음에, 라고 말하고는 양호실로 향했다. 진통제를 받고 교실로 돌아가니 수업은 시작하기 전이었다. 처음부터 기대했던 자신이 잘못이었다. 아템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꺼낼 수는 없다는 건 알았지만, 그냥 간단히 물어보려던 것 또한 말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꿈은 이어졌다. 그는 계속해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몇 번 들었지만, 자신 앞에 나타나지는 않았다. 조금 멀리서, 혹은 뒤에서 조언 해주듯 말을 건네었다. 웃기게도, 반복되는 동안 계속 그는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꿈 속 배경도, 자신도 달라지는 경우가 없었지만, 말을 걸어오는 건 달라지고, 그 내용까지 기억한다는 건 머릿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애초에 이건 자신의 꿈인데. 아니. 자신의 꿈이라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이곳의 아템은 카이바가 만든 상상의 존재라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왜 다른지. 왜 그렇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얀 꽃이 좋다는 의견에 흰 백합이 가득 피어있는 들판이라도 상상하면 되는 걸까 싶었다. 자면서 그 배경이 나올까 싶었지만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죽은 사람을 위로하기 위함이라는 것처럼, 하얀 꽃을 특히나 좋아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얀 들판 위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보았다. 꽃이라도 선물하는 게 어떤지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얀 꽃을 품에 가득 안은 채 카이바를 맞이했다. 오랜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기분 좋았어. 그냥 이렇게 있다는 자체가. 살아있는 것 같이 말이야. 달라진 것도 없는 것처럼. 카이바를 보며 이야기 하지만 카이바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제대로 된 답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죽여줄래? “
농담이라도 심한 이야기였다. 꽃의 의미는 아는 모양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라지고 싶다는 의미일까 싶어 불안했다. 아템은 괜히 웃었다. 미소였다. 자신감 넘치는 그 미소를 잊은 적은 없었다. 이어지고 반복되는 꿈이었지만 카이바는 만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나와 있어줘. 부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이 들린다. 보고 싶네. 하지만 만날 수 없어. 이렇게 왔잖아. 그날 일도 아마, 잊지 못했을 거야. 난 죄가 있으니까. 씁쓸하게 말하는 네가 오는 이곳이 나의 꿈이라고 너는 말하지 않는다. 기대감도, 우울함도 없이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기야 자신의 꿈에도 있으니 그의 꿈에 나타나지 없을 리라는 보장도 없고, 카이바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고 아템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처럼 꽃잎이 흩날린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그렇게 느껴지는 것 마냥. 꽃잎들이 빛나고 있었다. 점점 거대한 빛이 되었다. 눈이 부셔 눈을 꽉 감고 가리자 어둠이 이어졌다.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게 되었지만 피곤함에도 잠은 더 오지 않았다.
다음날 꿈에서는 그대로 백합 들판이었다. 피곤하다는 말에 눈이라도 감으라며 손으로 눈을 가린다. 아템은 오늘 꽃을 안고 있지는 않았다. 꽃이 있어도 이미 밟혀있던 땅이라 앉는 것도 문제없고, 더러워질 일도 없어서인지 아템은 들판에 누워서는 옆에 누워보라며 옆 자리를 툭툭 쳤다.
“깊게 잠들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해. “
눕지는 않지만 앉기까지는 했다. 그런 카이바에게 고집부리는 건 여전하다며 아템은 한숨을 쉰다. 일어날 시간이야. 보고 싶어지면 다시 올게.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주변은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카이바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없다는 걸 안다.
만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게 사라진 사람은 더 이상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후 잠은 푹 잘 수 있게 되었다. 꿈같은 건 아예 꾼 적이 없었다는 듯이. 회사나 학업에 무리가 갈 일도 없게 되었다. 피곤함도 수면을 통해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 그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는데. 그럼에도 찾지 않아서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열흘 가까이 지났다. 깊게 잠들며 꿈은 찾아오지 않았다. 간만의 휴일이었다. 학교도 회사도 나갈 필요 없는 날이라는 반복적인 날 중 하루였다. 기본적인 업무는 컴퓨터를 통해서도 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이긴 했지만 분명 만나줄 것이었다. 연락을 하니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다시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놀란 듯 당황한 목소리로 바뀌기는 했다. 카이바는 시간이 되는지 물었고, 유우기는 어디서 만날지를 생각하다가 자신의 집에 올 수 있는지 물었다. 카이바가 유명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편한 곳에서 이야기 하려면 그 쪽이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저기, 무슨 일 있었어?”
유우기의 질문은 가벼운 안부였다. 하지만 지금의 카이바에게 있어서는 정곡을 찌르며 무겁게 다가왔다. 진실과 거짓 중에 뭘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이야기는 지금 할 것도 아니고, 자세히는 해야 할 부분도 있으니 있었다고 답을 했다. 사실 조언자에게 거짓을 말하면 안 되었지 싶었다. 유우기는 아무 대답 없다가, 적어도 30분 후에 와달라고 했다.
뭐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유우기는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반 넘게 마시고 나서야 카이바의 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아템이 꿈에 나온다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그런 걸로 바쁜 스케줄 와중에 유우기의 집까지 오는 것은 드물 것이었다. 전화도 있고, 그의 비서나 모쿠바가 대신 올 수도 있으니까. 그가 그의 일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꺼내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는 공장에서 하루 수천 병을 찍어내는 오렌지 주스에는 흥미가 없을 것임을 알았지만 유우기는 그의 몫까지 오렌지 주스를 내어왔다. 그럼에도 유우기는 묻지 않았다. 카이바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했다. 그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아템이나 유우기나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작했다. 그동안 계속 되었던 긴 꿈의 내용에 대해서도, 그와 나눈 대화들에 대해서도 전부 이야기했다. 카이바는 그에게 꿈에서 아템이 나온 적이 있는 지에 대해 물었다. 나온 적은 있었는지 물으려다 그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겐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을. 궁금한 게 있다고 목적을 말한 카이바는 다시 한참이 지나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실 궁금한 게 없냐는 물음에 카이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가 문제냐며 말을 하라는 듯 유우기는 다시 남은 주스를 들이켰다. 카이바는 그 말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너는 말해주지 않을 거잖아. 표정이 묘하게 구겨진다. 카이바는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다. 말을 해야 할까 싶었던 고민은 그의 표정과 같은 답변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사실은 듣고 싶지 않아. 단호한 말에 카이바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유우기는 애써 웃어 보인다.
“하나 확실한 건, 며칠 사이에 네 꿈이 끝날 것 같아. 감이지만. “
“울 것 같네, 너.”
가끔은 나도 만나고 싶어. 추억이지. 그리움도 추억도, 과거라는 이름으로도 남지 못했어. 만나면 말해줘. 보고 싶다, 고 전해줘. 눈물이 터져 나오면서 유우기는 두 팔로 눈 주위가 빨갛게 변할 정도가 될 때까지 비볐다. 눈물을 줄줄 흐르는데, 카이바는 옆의 화장지를 잠깐 보다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눈물이 그치고야 자신이 어떤 걸로 눈물을 닦았는지 안 모양이었다. 유우기는 세탁해서 돌려주겠다며 젖은 손수건을 접어 옆에 놓았다.
“괜찮다면 그렇게 해. 마음껏 만나고 마음껏 대화해. “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줄 알았어. 너는, 그와 오래 함께 지냈으니까.”
“아니. 난 몰라. 왜 너에게만 나타난 건지.”
하지만 분명 유우기는 알고 있다. 아템에 대한 건 그가 카이바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유우기는 다시 조용해졌다. 카이바는 이만 가보겠다고 했다. 유우기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게 우는 모습을 보여서인지, 도움이 되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우기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잠시 바쁜 일들로 잊고 지내다가, 결과적으로 감은 믿을게 못 된다고 생각한 날, 카이바는 다시 꿈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드디어 왔다는 소리와 함께 반겨주는 이가 있었다. 아템은 화관을 만든 모양이었다. 웃으며 반기는 사람이 보였지만 인사는 할 생각이 없었다. 지난번 꿈부터 이어 이야기를 한다면 할 말이 꽤 많아진 참이었다. 하얀 백합이 가득한 들판의 두 사람만 있다. 여전히 꽃들은 아름다웠다. 시들지도, 지지도 않은 꽃들이었다. 아템은 화관을 카이바의 머리에 씌우며 괜찮다고 말했다. 아템은 자신이 잠들 때가 왔음을 알리려고 마지막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감이 정확한 때도 있다. 무서울 정도로. 유우기가 했던 말이 사실이 되고 카이바는 그래, 하고 말았다. 아템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카이바가 대답할 말은 없었다. 꿈에 계속 나타나서 귀찮게 했고, 카이바는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니었다는 말을 했지만
“사랑이라는 이름도 사랑으로 남지 못하게 해줘. “
“너는 참 비겁하구나.”
웃는 게 전과는 달라진 것처럼. 안색이 좋지 않다. 사실은, 인사 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음에 또 만날 것만 같아서. 확신 없는 말투로 내뱉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렇게 정하자.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한다. 서서히 꿈은 흑백이 된다. 하얀 백합이 가득하던 들판은 그대로 하얗지만, 아템은 색을 잃었다. 카이바도 마찬가지로 색이 사라진 자신의 손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파랗다 못해 백합까지 파랗게 물들일 정도로 파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대한 바람에 백합은 꽃잎을 흩날리고 하늘마저 하얗게 물들였다. 그는 자신이 점차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백색이 될 때 다시 한 번 암흑으로 물들며 일어날 것을 알았다.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의 답은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카이바가 남기는 말에 아템은 그저 뒷모습만을 보였다.
유우기는 학교에서 카이바를 만났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카이바가 먼저 다가왔다. 끝났어. 가벼운 말이었지만 무거운 의미였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는다고 해도, 그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리라고, 유우기는 그렇게 생각했다. 손수건을 돌려주며, 카이바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그래. 카이바는 담담했다. 슬슬 회사 일로 더 바빠질 거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유우기는 자신에게 왜 그런 소리를 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얼마 안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사랑한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서로 만나기 위해 성장하지 않았고, 성장하지 못했다. 눈물이 터져 나올 때에야 꿈이 꿈이었음을 되새긴다. 현실인가, 꿈인가를 따지자면 현실에 가깝다. 하지만 그저 꿈이라는 사실은, 현실을 죄어오고 압박하며 죽이기 위해 너는 꿈으로 나타났다. 너는 꿈이었다. 네가 사라진 의미가 있길 바란다. 네가 존재한 의미가 있길 바란다. “
듀얼 대회의 연설문은 한편의 러브레터처럼 들려왔다, 유우기는 이것이 누구에게 바치는 이야기인지 알 수 있었다. 유우기는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카이바는 쉽게 질 상대가 아니다. 많은 듀얼리스트들이 카드와 듀얼리스트들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카이바는 연설대 옆 계단으로 내려갔다. 리무진을 타고 이동했다. 듀얼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고, 백합 꽃잎처럼 하얀 종이가 도미노 공원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