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nation
“카이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에서 깬 카이바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아템의 모습이 보였다. 차마 대꾸할 힘이 없어서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은 그는 한 번 깊게 호흡한 뒤 그대로 멈추어있는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템의 표정은 조금 전과 변함이 없었다.
다만 단 잠에서 깬 카이바의 표정은 쉴새 없이 구겨져있었다. 아니, 아마 그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카이바는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려 했다.
“...카이바.”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라.”
그 말에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지만,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 마냥 험악해진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아템은 쫓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기분이 나쁜 아침을 맞는 게 이번이 몇 번째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아템을 만나지 못한 날이 얼마나 되는지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마치 카운트를 세는 기계라도 있듯, 너무 정확하게 기억난다.
그래서 그의 머릿속에서 숫자가 바뀔 때마다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더욱 머릿속에 더 깊숙이 새기기 위해서 그가 만들어낸 허상을 언제든 그의 눈에 보일 수 있도록 두었다.
겉모습은 똑같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는 만질 수도 없고, 그의 세상에 자신만이 존재하고 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진 환상.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보고 싶은 진짜 아템을 더욱 기억하고, 찾으려 하는 것이다. 온전히 카이바 그 자신의 힘으로.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템을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 당연한 얘기다. 천년퍼즐에 봉인 당했던 영혼도 유우기와의 듀얼로 길고 길었던 싸움을 끝내고 명계로 돌아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버렸으니까.
유우기에게서 그 말을 들었던 어느 날의 카이바는, 여태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해왔던 세상이 한 번 무너짐을 느꼈다. 겨우 믿음을 가지고 쌓아올린 모든 것이 부질없었음을 느끼는 순간, 마지막 희망을 잃은 자신은 어떻게 해야 했는지.
몇 번을 고민해봤지만 그의 사전에 전진 이외에 답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개발 중인 새로운 듀얼시스템을 최후의 보루 중 하나로 삼아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카이바가 회사에 들어와서 바로 걸음을 옮긴 곳도 개발실이었다. 회사보다는 개발실에 출근도장을 찍는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정도였다. 직원들도 이미 익숙한지,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시 본인들의 할 일에 몰두했다. 모두가 연구에 진땀을 빼고 있는 사이 연구 성과를 보고, 점검한다.
그렇게 몇 번을 보고 계속 봐도, 기술력자체는 완벽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낸 집행력도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현대의 기술로는, 정확히 말하자면 카이바 코퍼레이션의 기술로는 불완전한 부분이 존재했다. 이론 자체는 이미 성립이 되었음에도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스템을 실행한다면 개죽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카이바는 낮게 혀를 차며 평소보다 이르게 개발실을 나왔다. 요지부동의 자세로 서있던 이소노가 놀라며 그를 따랐다.
“이소노. 개발부서 퇴근 전에 일일 보고서를 챙겨와.”
“네, 알겠습니다.”
이소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한 번 훑어본 뒤 카이바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래서 이소노가 측근인 거겠지. 카이바는 거의 달리다시피 회사를 나섰다. 차로 갈까 하다가 운전수가 없을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헬기로 향했다. 귀를 때리는 소음을 헤드셋으로 막고 집으로 돌아오니, 예상치 못한 귀가여서인지 사람이 없었다.
사실,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하자고 집을 온 건 아니니까.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창밖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는 아템이 있다. 카이바는 자신을 보고 있는 그를 바라본다.
“카…….”
“안 부르고 뭐하는 거지?”
이럴 때는 정말 제멋대로다. 아템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아침에 금지되었던 이름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카이바는 대답 없이 짙은 보랏빛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놀라서 커진 눈동자에만 시선을 고정하던 그는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도출해낸 결론을 다시금 생각해낸다. 완벽이 아니면 성공이 아니라고 생각한 카이바가 최대한 낮춘, 반절도 절망적일 정도로 못 미치는 확률. 더 이상 끌어올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것에 매달려야 할지, 카이바는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너는, 왜 사라져서.”
눈에 독을 담은 카이바는 아템을, 그와 같은 외형의 다른 이를 보았다. 진짜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리 없기 때문에 마음껏 자신이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을 풀었다.
“왜 나한테 아무런 말도 없이, 무엇하나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한 채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돌아가서.”
아템은 이제 곤란해 하고 있었다. 무언가 문제가 있을 때는 얌전히 있으면 무탈하게 넘어가고는 했지만, 오늘은 그러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템의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카이바는 이제 거의 악을 쓰는 수준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으면 너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빌어먹을 차원이라는 것을 넘어서. 너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다시는 시도조차 못하게 되는데. 너는, 왜.”
나에게 사랑을 말했으면서 그렇게 떠나간 건데.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분노의 끝은 자연스럽게 파괴로 이어진다. 예전이라면 그의 방에 있던 고가의 물건이 부서지거나 찢어져 한낱 쓰레기가 되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되는 적당한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눈앞에.
“사라져.”
“카이……. 알겠습니다.”
아템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미 반쯤 투명했던 그가 바스러지듯 사라진다. 명령 하나로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 아템은 몇 명일까. 자신을 괴롭혔던 아템이 없어졌을 때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던 그지만, 또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면서 다시 새로운 아템이 눈을 떴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그의 환영을 만드는 것이 두려워졌다.
만약 오늘의 카이바가 아템을 만들어버린다면 그 환영에 만족해버릴 지도 모를 것 같아서. 계속되는 절망으로 인해 타협점을 찾아버릴 것 같아서. ……그가 지향하던 미래를 스스로 끊어버리고 과거에 얽매여버릴 것 같아서.
카이바는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카이바의 성을 단 후 평생 울어본 적이 없는 그가, 울고 싶다고 생각을 하게 된 날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