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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다, 잃다.

 

*세토아템

“ 파라오께 인사드립니다. ”

세토는 가벼웁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파란 천 자락이 황금색 바닥 위로 사그락 흩어졌다. 가장 높은 태양의 권좌에 앉아서 모든 이를 굽어 살필 새로운 파라오의 앞에서 세토는 그 누구보다 먼저 고개를 숙였고 가슴에 손을 짚었다. 목숨을 바쳐 태양을 수호할 신관 세토입니다. 심지가 굳은 목소리였다. 사막 위에서도 단단하고 촘촘하게 뿌리내린 긍지라면 황궁을 거뜬히 지지해주고도 남을 터였다. 세토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아템으로서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고개 들어도 괜찮다, 세토. 그의 이름을 혀끝에서 굴리며 아템이 세토에게 손을 내밀었다.

“ 믿고 있다. ”

내민 손을 기꺼이 붙잡아 일어서는 사내를, 문자 그대로 믿고 있었다. 언젠가 모래 위에 그렸던 평화로운 세상을 직접 두 손으로 이끌 때가 온 순간은 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신관단에게 충성의 맹세를 한아름 받아든 아템이 뚜벅뚜벅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너른 사막의 수평선과 일직선으로 떠있는 해가 모래알 하나하나를 노랗고 붉은 여명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금장식을 두른 아템도 그렇게 빛이 나는 듯 싶었다. 세토는 잠자코 숨죽여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왕궁 앞을 빼곡이 채운 백성들 앞으로 섰을 때, 와아아! 새로운 파라오를 맞이하는 함성이 하늘을 울렸다.

파라오, 그의 이름을 아는 자는 없었으나 모두가 그를 희망이라 일컬었다.

 

* * *

 

“ 이 전에 삼환신에게 선택을 받은 파라오가 존재했다 합니다. 절대적인 악의 세력이 국가를 위협하려고 할 때, 잠들어있던 삼환신이 파라오에게 미리 깃든다고 하더군요. 파라오, 듣고 계십니까. ”

“ 아, 세토. 물론이지. ”

“ 유독 피곤해보이십니다만. ”

파라오 즉위식으로부터 이틀이 지난 낮이었다. 아템은 세토의 물음에 슬슬 고개를 저었다. 잠을 조금 설쳐서 그래. 세토의 제법 다정한 의심이 향하기 전에 아템은 눈꺼풀을 문지르며 덧붙였다. 그렇습니까. 그런 아템을 물끄럼 바라보던 세토가 쌓아두었던 파피루스 종이를 도르륵 열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나무에 등을 대고 앉아있던 아템이 예상외의 침묵에 세토를 바라보았을 땐, 이미 세토의 손에서 파피루스는 도로 말려있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세토가 짤막한 수업을 임의로 마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아템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가 보기 좋게 휘었다. 다음에 두 배로 하면 됩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이며 목소리였지만 아템은 아랑곳 않고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세토가 조용한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머리 위에 드리워진 나무의 긴 잎이 얼기설기 그림자를 엮어냈다. 황궁 내에 만들어놓은 얕은 연못과 정원은 세토가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을 썼단 말 그대로 깔끔하고 고즈넉했다. 무릎을 세워 앉은 아템은 버릇처럼 목에 걸린 천년퍼즐을 쥐었다. 이따금씩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이 들렸다.

“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

“ 파라오. ”

“ 그냥 예전부터 해주고 싶은 말이었어. ”

아템은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피곤해. 항아리 속에 숨던 어리광이라기에는 미묘한 구석이 있었다. 잠시 눈을 붙이십시오, 파라오. 세토가 천천히, 기름한 손끝을 뻗어 아템의 고개를 제 쪽으로 기대게 만들었다. 너에게라면 무엇이든 맡길 수 있겠지. 그늘에 식은 공기가 얇은 바람이 되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났다.

 

* * *

 

생각해보면 선왕의 등은 넓었고 굽어보던 시선은 태양보다 부드러웠다. 늘 있던 수업이 듣기 싫어 해가 질 때까지 항아리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있었던 때에, 선왕은 엄한 꾸중 이전에 아템에게 손을 먼저 내밀어 주었으므로. 뻗어진 커다란 손과 손톱이 말랑거릴 만치 어렸던 손은 두 마디보다도 더 차이가 났다. 선왕은 손쉽게 어린 몸을 꺼내주셨고 잘못한 구석을 알기 때문에 아템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을 적이면 얼굴을 들라 했다. 사막의 밤공기는 낮과는 달라 금세 체온을 앗아갔으니, 작은 머리통 위로 떨어지는 것은 벼락같은 호통이 아니라 풀냄새가 함뿍 배인 남색 망토 자락이었다. 온몸에 친친 둘러도 여유가 남을 정도로 커다랬지마는 당장 혼이 나지 않는 것에 조금은 기뻤던가, 아주 드물게 선왕의 품에 안기면 맡아볼 수 있던 내음이 좋았던가,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아템이 작은 손으로 망토를 두르는 것 까지 확인한 선왕은 곧 말없이 황궁 복도를 걸어나갔고, 아템은 조금 잰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그러면 아템은 느낄 수 있었다. 뒷짐을 지고 앞서 걷던 선왕의 발걸음이 느려지던 걸. 그러면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황금으로 만든 것처럼 윤이 나는 기둥과 복도는 밤에도 희끄무레한 빛이 났다.

너는 좋은 왕이 되어야 한다.

꺼지지 않는 불빛들이 작지 않은 마을들에 점점이 찍힌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선왕은 문득 그리 말했다. 끝없는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향해있는 시선의 끝이 어디까지 이어지고 있는지 가늠하지 못할 순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아템은 네, 작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릿했던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생동하는 때, 으레 찾아오던 침묵을 뒤로한 채 선왕은 고개를 아템에게로 돌렸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맞물린 시선은 이름 모를 풀을 씹은 것만큼 썼다. 파라오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아야한다, 태양이 지는 순간 어둠은 찾아오고, 어둠이 모든 것을 잡아먹을 것이다. 금기처럼 전해들은 말을 역행하는 이는 정작 선왕이었다. 한 쪽 무릎을 꿇고, 아직 어렸던 아템과 눈을 맞추며 아직 귀걸이 장식을 달지 못한 귀를 만져주셨다.

그전에, 스스로에게도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한단다. 아들아. 약속해줄 수 있겠니.

그건 꼭 바람 같았다. 어린 아들에게 닿기 이전에, 스스로는 이루지 못했던 소원.

조금 일찍 그 뜻을 깨달았다면 나았을까, 하지만 아템은 생각했다. 나는 깨달음이 늘 늦은 사람이었고, 역을 가정했어도 선택은 변하지 않았으리라. 어머니를 꼭 닮았다던 귀를, 눈꺼풀을, 콧등— 그렇게 모든 것을 끌어안아 주셨던 그 날 밤.

삼환신을 조우한 순간마저도.

 

* * *

 

채 영글지 못한 손끝이 좌지우지 하는 막대한 힘은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오히려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대사신과 파라오의 삼환신이 격돌하는 순간마다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찢어지는 굉음이 낭자했다. 매캐한 분진이 검은 하늘을 향해 휘몰아쳤다. 회색 먼지와 핏물을 뒤집어쓴 이들은 이미 지쳐있었고, 시체 위로 울음을 토해냈다. 모든 것이 절망과 함께였다. 식은땀인지 피인지 모를 끈적한 것들이 들러붙은 얼굴들 위로는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이 그을려 있었다.

아템이 폐허로 변해버린 죽음의 땅을 딛고 섰을 때 느낀 감정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목울대가 울컥이고 손이 떨릴 만큼의 공포와 마주해야만 했다. 폭발하는 붉은 화염과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올라가는 새카만 연기. 이것이 일상이 되기까지 너무도 끔찍한 시간이 흘러버렸다. 완전히 재림한 대사신은 다시는 볼 일 없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니 보고 싶지 않던 악몽 그 자체였다. 운명처럼 번지는 감정이었다. 희망이 없었으므로.

그러나, 망설임은 한 번이면 족했다.

아템은 목에 걸었던 천년 퍼즐을 빼들었고, 곧장 말 위로 올라탔다. 하얀 말이 두어 번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대사신을 봉인할 방법은 아직 존재했다. 삼환신마저 쓰러지며 엄습한 통증 따위는 핏물과 함께 삼켜냈다. 파라오! 아템의 의중을 알아채고 달려온 세토의 목소리 끝이 처참하게 갈라졌다. 가슴을 움켜쥐었던 아템이 가슴이 빠듯해 질정도로 숨을 참았다. 매캐한 모래먼지 사이를 찢어내는 건 매한가지로 찢어진 목소리였다.

“ 전쟁이 끝나면 내 이름을 지우고, 천년 퍼즐을 조각내야 한다. 세토. ”

이건 명령이야.

그러나 끌어올린 입꼬리와는 별개로 결연한 자줏빛 시선은 단호하기만 했다. 아템의 말이 옳았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모두의 목숨을 좌지우지 한단 것이 신관으로서 얼마나 어리석인지를, 세토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부탁만을 할 줄 알던 이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일에 명령이란 최초의 사족을 달았다. 세토는 울음처럼 터질 듯 일렁이는 숨을 죽였다. 말 위에 올라탄 아템 역시 세토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퍼즐을 조각내란 말을 끝내는 지키고 말리라는 것도.

선택받은 운명이 이토록 기구한 것인지 알았더라면. 어째서 당신이, 세토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아템을 바라보았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을 쫓는 뒷모습이었다. 믿고 있어, 온갖 비명과 굉음 속에서도 뚜렷이 남은 그 한마디는 유언이었다. 믿음, 숱하게 어깨를 두드리며 건네주었던 진심의 무게가 참을 수 없이 무거웠다.

 

* * *

 

모래 더미에 묻힌 몸은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사막에서 태어나 사막으로 돌아간다 ㅡ 먹구름이 걷히고 지친 몸에 드디어 닿은 햇살은 정작 칼날처럼 아프기만 했다. 아템이 손을 뻗었다.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하늘 위로.

짧은 삶에 마침표를.

뇌까리는 문장은 모든 마디가 썼다. 이 손가락도 어머니를 닮았었을까. 드문드문 드는 상념조차 먼지로 모래로 사라지는 이 순간만큼은 눈을 감고 쉬고 싶었더라고, 용서해주세요,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 손 안짝에서 부서지는 것처럼 탈력감에 젖은 몸이 끝부터 흩어져갔다.

그것이 끝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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